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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너스

플라타너스

 

어릴 때 봤던 플라타너스는 모두 다 컸다.
어릴 때 컸던 플라타너스는 내가 60이 되도록 60년을 더 커 이젠 모두 다 더 큰 나무가 돼 있었다.

 

이 동네에 집 지으러 와서 더 큰 플라타너스를 봤다.
큰 나무가 있는 곳이라고 알려줘 벌판 저 멀리서 플라타너스를 보고 찾아왔다.

 

벼 이삭 팰 때 기초를 하고 수확하는 콤바인 소리 들릴 때 벽을 올리고 서리가 올 때 지붕을 덮었다.
플라타너스 잎도 푸르름을 잃고 누렇게 말라 텅 빈 벌판처럼 됐을 때 집을 다 지었다.

 

늦여름에 와서 포클레인으로 땅을 고르고 첫눈이 올 때 삽을 놨다.
벌판에 푸르른 벼가 일렁일 때 왔다가 텅 빈 벌판에 흰 눈이 덮였을 때 떠났다.

 

집 짓는 틈틈이 플라타너스 아래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콜라를 마시며 쉬기도 했다.
플라타너스 잎이 그늘을 만들어 줄 때도 플라타너스 아래로 갔고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로 갈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도 한 번씩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로 가서 담배를 피웠다.

 

가을이 깊어 넓은 벌판에 아침이면 서리가 덮일 때 플라타너스 잎도 곧 지겠거니 했다.
마무리 공사도 끝나고 벌판에 살얼음이 어는 겨울이 와 단풍나무도 느티나무도 잎이 다 졌지만 플라타너스는 여전히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잎을 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건물 옥상 슬라브 콘크리트를 타설하고 곱게 미장한 바닥을 비닐만 덮을까 아니면 보온덮개도 같이 덮어 온다는 첫눈에 대비해야 하나 하며 어두워질 때까지 옥상을 지키다 플라타너스 잎이 지는 걸 봤다.

어두워지고 첫눈에 플라타너스 잎이 졌다.

 

기상청 예보대로 세찬 바람과 함께 눈이 몰려왔다.
눈과 함께 세찬 바람이 불어 마른 가지에 아직 남아 있던 플라타너스 마른 잎은 눈처럼 바람에 날려 텅빈 벌판으로 우수수 날아갔다.

 

나 어렸을 때 봤던 플라타너스는 모두 다 컷다.
60인 내가 보는 플라타너스도 모두 다 더 큰 나무다.

 

세월이 가면 플라타너스는 자란다.
세월이 가도 이제 나는 자라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잎이 진다고.
세월이 가면 나처럼 느려질 뿐이라고.

 

P.S.
벚나무 꽃잎이 바람에 날리고 푸른 잎이 돋는 오늘 옆 도로 확장공사로 다시 본 플라타너스는 지난겨울 텅 빈 가지 그대로였다.